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메이 덴노 (문단 편집) === 백제와의 관계 === 조메이 덴노와 관련해서 눈여겨 볼 것은 《부상략기》(扶桑略記, 14세기 경 편찬. 11세기 경에 편찬되었다는 설도 있음)라는 [[일본]] 고대 왕조사(王朝史)와 《일본서기》에 기술된 조메이 덴노의 [[백제]] 관련 행적들이다. 《신찬성씨록》이라는 고대 기록에[* 고대 천황가의 혈통에 관해 써진 책으로, 원본이 유실되고 복사본들만 남아있다.] "비다츠의 손자 '백제왕'"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, 그가 조메이 덴노로 추정된다. 《일본서기》에 따르면, 7세기 중엽 조메이 덴노는 스스로를 백제인으로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. 《일본서기》는 >'''“조메이 천황이 '백제궁'을 짓고, '백제궁'에서 살다가 '백제궁'에서 붕어했다”''' 고 전한다. 14세기 초의 《부상략기》에도 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. [[파일:HD역사스페셜023[051014]백제대사 (1).jpg]] [[파일:HD역사스페셜023[051014]백제대사 (2).jpg]] [[http://enjoyjap.egloos.com/1960047|출처]] 또한 매우 중요한 사실(事實)은, 《일본서기》가 >'''“조메이 천황은 비다츠 천황의 친손자로 백제강(百濟川) 강변에다 '백제궁'과 백제대사(百濟大寺)를 지었으며 9중탑(九重塔)도 세웠다”''' 고 기록한 일이다. [[비다츠 덴노]]의 친손자인 '조메이 덴노'가 '백제궁'을 세운 터전도 바로 [[비다츠 덴노|친할아버지]]가 '백제대정궁'을 건설했던 곳과 똑같은 고장이었다.[* 일본 [[천황]] 중에 왕도에 ‘백제궁'(百濟宮)이라고 호칭하는 왕궁(王宮)을 지은 이는 [[비다츠 덴노]]가 최초였다. 당연히 조메이 덴노는 두 번째로 '백제궁'을 지은 것이었다.] 즉, 조메이 덴노가 [[나라현|나라 지방]] 백제강이 흐르는 터전에 일본 역사상 두 번째로 당당하게 백제 호칭을 붙인 왕궁과 사찰을 건설했다는 것은, 이 고장이 그 당시까지 엄연히 '''백제계 도래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'''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. 실제로 1997년 3월 일본 고고학자들은 나라현 사쿠라이시(櫻井市)의 키비(吉備) 연못터에서 ‘백제대사’의 옛 터전을 발굴했다. 이로써 《[[일본서기]]》에 기록된 대로 조메이 덴노 또한 639년에 '백제대사'를 지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입증되었다. 전형적인 백제양식인 판축기법에다 백제식 문양이 새겨진 기와가 쏟아졌다. 이 백제대사의 금당 기단 크기는 36미터와 27미터로(아스카 시대부터 내려오는 아스카지는 21미터와 17.5미터)로 아스카 시대에 세워진 절들 중 가장 규모가 거대하다고 한다. 또 9중탑은 남아있는 기단의 한 변의 길이 30m, 높이가 2m가 넘어가기 때문에, 초석 등이 제대로 남아 있지는 않으나 높이 80m 급의 거대한 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. 그 규모는 현대 남아있는 일본의 거대하다는 절들조차 우습게 넘어서는 규모다. 7세기 무렵은 유독 동서를 가리지 않고 궁궐 건축이든 절 건축이든 초거대 규모로 짓는 경향이 있었는데,[* 역사상 단일 궁궐로 가장 거대했던 [[당나라]] 장안의 정궁 [[대명궁]]과 신라에서 만들어진 [[황룡사]] 및 9중탑만 해도 어떻게 만들었나 싶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.] 백제대사 또한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. 그뿐만 아니라 1998년에는 역시 같은 지역에서 조메이 덴노가 지은 9중탑 터도 발견되었고, 드디어 ‘백제궁’ 터도 발견되기에 이르렀다. [[나라현]] 일대의 이름이 6세기에는 ‘백제'(百濟, 구다라) 그 자체였던 것이다. 초기에는 단순히 아스카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이가 좋고 선진국인 나라의 이름을 따 지었다고 여겨졌지만, 최근 [[도래인]]들의 숫자와 영향력이 예상외로 거대했다는 점에서 [[차이나타운]]과 같은 부류의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. 물론 규모와 영향력은 정계 중진까지 간섭할 정도로 거대했다. 실제로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기타 사다키치(喜田貞吉, 1871~1939년)는 >“비다츠 천황의 '백제대정궁'은 지금의 기타카쓰라기군(北葛城郡)의 구다라손 구다라(百濟村 百濟) 땅에 있었다” 고 밝힌 바 있다. (井上正雄 《大阪村全志》 卷四 1922) 이에 대해서는 현대의 저명한 역사학자 가토 에이코(加藤瑛子) 교수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. >“서기 641년 10월에 조메이 천황은 '백제궁'에서 붕어했다. '백제궁'은 [[소가]]씨(蘇我氏)의 본거지였던 소가(曾我) 땅의 북쪽인 구다라(百濟, 백제), 지금의 키타카쓰라기군(北葛城郡 廣陵町)에 있었다. 그 당시의 구다라 강(百濟川, 백제강)이 지금은 소가 강(曾我川)이고, 그 강변에는 옛날에 백제궁(百濟宮)이 있었다.” >---- >《大化改新の 眞相》. 1967. 한편 조메이 덴노와 '백제'와의 밀접한 관계와 관련해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대목이 《일본서기》에 기록되어 있다. >'''“641년 10월9일에 천황이 '백제궁'에서 붕어하시다. 18일에 왕궁 북쪽에 안치하고 빈궁을 만들었다. 이것을 ‘백제의 대빈'(百濟の 大殯)이라고 부른다.”(十三年冬十月己丑朔丁西, 天皇崩于百濟宮. 內午, 殯於宮北. 是謂百濟大殯).''' 조메이 덴노의 [[장례]]를 '''백제의 대빈'''으로 모셨다는 뜻이다. 이것은 백제 본국 왕실의 3년상 '국장의례'를 가리킨다.[* 백제 제25대 [[무령왕]](501∼523 재위)이 왕도(王都)였던 곰나루(웅진, 공주) 지역에서 ‘백제대빈’을 치렀다는 사실이 1971년 출토된 무령왕의 <묘지명>을 통해 입증되었다. 백제 왕실의 성대한 장례 의식을 [[왜]]에서도 똑같이 거행했다는 것은 당시 [[나라현]] 땅에 거주하던 백제계 세력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음을 추정케 한다.] 어째서 조메이 덴노의 장례를 '''백제의 대빈'''으로 모셨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건 아직 없지만 적어도 조메이 덴노 시절 백제계들의 영향력이 일본 조정 내에서 굉장히 컸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. 백제계 도래인의 영향력이 얼마나 거대했냐면 백제가 망하고 [[헤이안 시대]] 초기까지 백제계 도래인이 조정 내 실권 세력 중 하나였다고 한다. [[헤이안 시대]]를 연 [[간무 덴노]]만 하더라도 후지와라 씨족과 도래인들이 세운 천황이라서 외가인 백제계들을 대규모로 고용했다고 한다. [[후지와라]], [[미나모토]], [[타이라]], [[타치바나]] 씨족에게 권력이 전부 넘어가 기록에서 사라지기는 하지만 나라가 멸망하고도 200년 이상이나 그랬다는 소리니 대단하기는 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